칼럼이 있는 AI톡

[칼럼이 있는 AI톡]⑩ 우리들의 기술응전기(技術應戰記)

AI타임스 2021. 9. 29. 09:52
"칼럼이 있는 AI톡"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AI타임스 공동기획

 

[편집자주] 인공지능(AI)이 우리 일상 생활 속으로 점점 더 가깝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해서 설왕설래합니다. 많은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무릇 결론은 ‘사람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AI기술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실에서 그 속에 있는 인간과 문화, 철학과 예술에 대한 논의를 일상의 눈높이에서 해보고자 합니다. 때로는 AI에 대한 사색을, 때로는 AI 도입으로 바뀌는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재료를 만들어 선보이겠습니다. 이번 특별기획은 중앙대 인문콘텐츠 연구소와 AI타임스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글 싣는 순서]  

① “메타버스, 새로운 기술 아냐” 최적 타이밍 맞았을 뿐 / 박상용 교수

② 메타버스, 한류 앞에 놓인 새로운 길 / 황서이 교수

③ “화자(話者)가 누구인가?”가 중요해진 세상 / 조희련 교수

④ AI 번역,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 남영자 교수

⑤ 구직자 관점에서 바라본 AI 면접 / 문혜진 교수

⑥ AI는 소설 작가가 될 수 있을까? / 강우규 교수

⑦ 인간과 기계의 결합: 하이브리드(hybrid) 존재, 사이보그 / 양재혁 교수

⑧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AI-셰익스피어의 소네트 / 박소영 교수

⑨ 마술은 과학을 낳고, 과학은 마술을 낳고 / 박평종 교수

⑩ 우리들의 기술응전기(技術應戰記) / 김형주 교수

⑪ 인공지능윤리, 그 잠재성의 중심 / 문규민 교수

⑫ “우리는 목적 함수가 같아”: AI 리터러시 교육의 이유 / 이유미 교수 

 

토크 포인트(Talk Points)
AI가 우리 일상에 급속도로 들어온 만큼 불안감도 만만치 않게 늘어났다. ‘AI 시대에도 살아남을 직업 10가지’라는 콘텐츠 제목이 불과 2년 전에 비해 확실히 다르게 느껴진다.

AI 기술은 새로워도 AI에 대한 염려는 꼭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다. AI 시대 이전부터 다양한 기술들은 신기술이란 이름으로 인간 삶의 양식을 바꿔왔다.

낯선 기술에 대한 두려움은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따라왔다. 신기술에 맞서는 인류의 ‘기술응전기’가 시작된 것은 마차를 타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마주한 그 때 그 시절부터일 것이다.

[칼럼] 우리들의 기술응전기(技術應戰記)


김형주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 HK교수

 

“기술을 지배하려는 의지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절박해질 것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 갈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는 일은 일종의 수다이다. 미래 이야기는 과거 이야기보다 좀 더 쉽다. 일어난 일에 대한 말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한 평가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인(世人)들의 미래 이야기는 수다 이상의 지위를 얻기 어렵다. 인공지능 미래 담론은 수다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 주제가 핫하고 많은 유명인들이 이에 한 마디씩 거들고 있다는 이유에서 교양있는 수다로 인정받는다.

 

한편 수다는 논쟁으로 이어지기 십상인데, 그 논쟁에는 인공지능에 의한 인간 삶의 침탈을 경고하는 스티븐 호킹과 같은 유명인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앨런 머스크와 같은 기술지상주의자들, 낙관론자들이 단골 손님으로 초대된다. 이러한 수다는 이윽고 좀 더 본질적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 때 늘 거론되는 말 들 중 한 가지가 “AI 포비아(phobia), AI 필리아(philia)”라는 개념 쌍이다. 수다의 지향점이 과거로 옮겨간다는 것은 대화의 종착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뜻한다. 기술비평노선의 종착역을 알리는 단어쌍은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 테크노필리아(Technophilia)다. 글의 처음에 등장한 인용구는 이 무렵 등장한다.

 

“사람들은 기술을 정신적으로 장악하기를 바란다. 기술을 지배하려는 의지는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절박해질 것이다”

 

사실 이 말은 1950년대, 그러니까 지금부터 무려 70여 년 전 독일의 라인 강에 위용을 드러낸 수력발전소를 바라보며 뱉은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의 시대진단이다. 전후 시대인 당시를 원자력 시대라고 규정한 이 철학자는 지금을 인공지능 시대라고 규정하는 우리들보다 발 빠르게, 그리고 더 처절하게 사유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이 예언을 통해 지금 인공지능 시대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항상 반 박자 느린 인간의 이성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기술은 인간의 삶을 휘감고도 남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기술이었다. 그래도 칸트가 말했듯 질문은 인간의 본성인지라, 기술에 대한 물음은 당시 독일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도 “기술에 대한 물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기술이란 수단일 뿐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라는 야스퍼스의 말에 그는 “그렇건 그렇지 않건, 우리는 기술에 붙들려 있다”고 답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기술은 우리를 둘러싼 생명이 있는 분위기이며 공기이다. 그가 볼 때, 야스퍼스와 같은 사람은 이미 자가 호흡을 시작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 들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기술이라는 정령(精靈)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기술은 그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원자력 시대를 살아가는 현 존재들에게 삶에 개입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구성하고 있는 기술 그 자체에 대해 항상 깨어 성찰할 것을 당부한다.

 

기술의 사회적 침습은 곧장 학문의 세계로 이어진다. 하이데거의 스승이었던 훗설은 우리의 생활세계를 건조한 산술의 언어로 이해하려는 실증주의 일변도의 당시 학계의 분위기를 “학문의 위기”라 진단한다. 위기는 이념 학문의 사실 학문에로의 환원에서 시작된다. 그는 정갈한 숫자로 주변의 모든 것을 재단하여 보여주는 것이 외관상 세련되어 보이지만, 오히려 삶의 참모습을 가리는 차폐물이 된다는 주장으로 과학주의적 세계관에 응전하였다.

 

한편 응전은 다른 양상으로도 진행되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공격 진영의 위용에 맞불을 놓는 전략도 있는 한편, 상대방의 장점을 흡수하여 자신의 에너지로 내재화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더 공고히 하는 방법도 있다. 예컨대 훗설과 같은 시대를 산 딜타이는 지향성과 주관성을 기치로 실증주의와 대결 구도를 펼친 그와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삶의 철학자 딜타이의 “정신과학”이라는 용어를 음미해 보라! “정신-과학”은 어떤 사람에게는 형용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다.

 

딜타이는 수학이라는 공용어를 무기로 세력을 넓히고 있던 자연과학으로부터 인문학의 고유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그것의 보편적 방법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보편적 방법론의 유효성을 과학으로부터 목격한 그는 이러한 방법론의 도입을 통해 자기 독백적 성향을 지닌 심리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체험, 이해 등과 같은 키워드로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론을 수립함으로써 맹렬히 뻗어오는 자연과학의 손길로부터 유유히 벗어난다. 이러한 전략은 다름 아닌 근대 계몽의 완성자 칸트에게서 따온 것이다.

 

노년의 형이상학자 칸트는 그의 오랜 벗 멘델스존에게 형이상학을 갈아 없애버린 자(Allerzermalmer)라는 평을 듣는다. 어쩌면 그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이 표현은 역설적이게도 칸트 철학의 토양에서 성장한 소위 칸트 키드(Kant Kid) 카시러에 의해, 그것도 하필이면 칸트를 기리는 학술지 칸트 연구(Kant-Studien)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가난한 시간 강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 전공 교수 자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청빙마저 마다한 이력이 있는 그에게 이는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상황도 하이데거, 훗설, 딜타이가 경험하였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술의 최전선에 닿아있는 과학은 칸트의 시대에도 혁신을 거듭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자연과학자 뉴튼은 최고의 스타였고 칸트는 그의 팬이었으리라. 칸트가 평가하길 “형이상학은 끝나지 않은 전쟁터에서 여전히 암중모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뉴튼의 역학이 그러하듯, 아르키메데스적 고정점 수립만이 형이상학을 굳건한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그를 영원한 스타로 만들어 준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하였다. 멘델스존이 볼 때 사유하는 자들의 발자국이 빚어 낸 오솔길 위에 수학이라는 계측기와 자연과학이라는 트럭을 동원해 고속도로를 낸 자가 칸트였을 것이다.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후예들은 그렇게 칸트를 욕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어떠했을까? 과학혁명의 소용돌이 속 그의 철학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남았을까?

 

신의 목적이 전 우주와 우리의 정신까지 지배하고 있을 때, 자연에는 자연만의 법칙이 있다는 세계관이 등장하였다. 이윽고 이 기계론적 세계관이 힘의 균형을 깨뜨리면서 근대라는 과학의 시대가 열렸다. 기계론이 목적론을 대체해 가고 있을 때, 데카르트는 마음과 세계, 즉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고, 물질의 세계는 자연과학의 지배를 받는 영역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 전략의 숨은 목적은 ‘생각하는 주체’라는 정신 세계의 최후의 보루를 성역화하는 것이었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지키는 전략이 적중한 것일까. 이렇게 지켜낸 ‘생각’이라는 보루로부터 근대의 학문은 다시 꽃을 피웠다. ‘생각’은 과학혁명 응전기의 전리품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기술이란 존재는 항상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 주변을 지배해왔다. 그리고 철학은 태생상, 그런 기술을 항상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두 눈은 크게 떴지만 빈곤하기 짝이 없는 외양을 한 철학은 어마무시한 권력체인 기술에 항상 매몰되는 듯이 보였으나, 때로는 기술에 마주 서고, 때로는 체질을 현격히 변화시키며 생명을 연장하고 몸집을 키워왔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기술의 태동기에 한 몫을 하였던 철학이 이제는 그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싸워나갈 미래의 모습에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기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역사에 있다.

 

인공지능 수다의 원동력은 미래에서 다가오는 전조(前兆)에 대한 한계 지워진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원자력 기술이 가져온 변화를 몸소 체험한 하이데거의 통찰은 지금 우리에게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는 경험을 했지만 우리는 아직이기 때문이다.

 

“일어났던 것은 후에 다시 일어날 것이고, 행했던 일은 또 행해지게 될 것이다. 하늘 아래에 새 것은 없다.”(전도서 1장 9절)

 

비하인드 인터뷰

 

칼럼을 읽은 후 칼럼니스트에게 질문 혹은 반문하는 것은 다소 귀찮거나 힘든 일이다. 독자를 대신해 AI타임스가 여전히 남은 궁금증을 풀어봤다. 조금은 매울지도.

 

김형주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 HK교수

Q. 미래 AI 시대에 대해 일론 머스크, 스티븐 호킹이 아닌 과거 철학자들의 관점을 살펴봐야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배운다는 말이 있다. 일론 머스크,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AI 전문가들의 담화 속에는 철학이라는 큰 틀에서 오랫동안 논의된 내용이 녹아 있다.

 

Q. 칼럼 제목과 본문에서 말하는 ‘기술응전기’란 무엇인지?

 

우리 사회에 새로이 등장한 기술에 대처하는 인간 역사다. 하버드대부터 유럽 연합, 우리나라까지 전세계에서 마련한 AI 윤리 가이드라인이 현재 90개에 달한다. 철학자 관점에서는 마치 인류가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방어책을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모습 같이 보인다.

 

Q. 기술응전기는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뚜렷한 증거에 따라 판단하자면 근대 초기인 1500년 정도라고 볼 수 있다.

 

Q. 자동차, 증기기관차, 원자력과 같이 이전에 ‘신기술’로 여겨졌던 것들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AI 시대인 지금의 고민과 일맥상통하다고 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의 자율성은 AI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이란 이름부터 1950년 등장, 80년대에 정착한 고무줄 개념이다. 칸트가 말하는 원형지능, 모사지능 중 모사지능 개념이 인간 지능을 모사하는 AI와 비슷하기도 하다.

 

Q. 지능을 가진다고 꼭 인간으로 여길 수도 없을 것 같다. 지능과 인간성은 별개인지?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는 높은 지능을 가졌지만 자신이 행위 주체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스스로가 이겼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AI에게는 우리와 달리 삶이 없다. 인간중심주의 관점에서 AI는 메타인지, 자기의식을 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현격히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Q. AI를 비롯한 기술은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도구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선 개념이 여기에 부합한다. 자체의 기능(function)을 충실히 발현하는 것이 곧 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가져올 어마어마한 손익 관계와 해악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끝난다고 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이 기술이 가져올 영향을 굉장히 크게 본다. 가치중립적인 것을 넘어 기술이 역으로 우리를 규정한다는 입장이다.

 

Q. AI 시대가 가까워질수록 철학, 인문학의 가치가 줄어드는 상황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인문학이 공학 발전 방향을 주제로 치열하게 연구해서 관점을 제시한다면 메리트가 있다고 본다. 단순히 공학의 한 포지션으로 들어가거나 데이터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존재 가치를 자각하면서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하겠다.

 

Q. AI 시대에 인문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 윤리적인 데이터를 구축하고, 인문학 관점에서 공학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외 시민으로서의 공학자, 개발자의 자율성, 자기존엄성을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다.

 

Q. AI 개발자도 인문학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AI 윤리가 중요한 화두인 만큼 당연하다. AI 윤리 기준은 보통 많은 내용이 함축된 결과물이다. 이를 개발자가 스스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려면 기본 윤리학을 알아야 한다.

 

Q. 철학과 김형주 교수가 보는 AI 시대란?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자연스레 공존하는 시대다. AI라는 새로운 존재자가 등장하는 만큼 기존 개념과 가치관이 많이 바뀔 것이다. 예를 들어 AI를 인간과 같이 취급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서로 관용하면서 공존하는 시대가 될 거라고 본다.

 

AI타임스 박성은 기자 sage@a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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